걸음을 옮기는

* 오전 10시 58분 - 12시 10분 *


before
새벽에 기괴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쪽 귀에 mp3를 꽂고 잤는데 새벽 5시에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DJ 목소리였다. 마치 내 머리맡에서 웅성웅성, 수런수런 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오싹했다. 잠으로 물리쳤다. 잠에서 깨기 전 유채꽃을 보았다. 산책하라는 지시였나보다.

어제는 너무 더워서 산책을 걸렀다. 남편도 일에 바빠 오지 않았으므로 더 의욕이 없었다.
어제 보낸 하루는 내 생애 가장 긴 주말이었다.



walking
산책로 한 복판을 걷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어느 순간엔 복판을 장악하고 있을 때가 있다. 내 걸음을 옮기게 한 이는 벌레들이다. 검은 객차들을 질질 끌고 기어다니는 바닥의 증기기관차, 벌레. 걔 이름을 모르겠다. 송충이는 아니다. 지식 검색으로 찾아보려했는데 사진조차 보기 싫어서 그대로 두었다. 똬리를 튼 지렁이들이 요새 자주 산책을 나온다. 지렁이 주제에 똬리라니, 싶다가도 지들도 본능인데 어쩌겠나 싶다. 주말엔 가족들이 많다. 자전거 탄 가족들이 산책로를 누빈다. 가족없는 천애고아처럼 서글퍼진다. 하필이면 mp3 충전이 다 되서 위로받을 곳도 없다. 팔 근육을 키우려고 애쓰는 중인데 이건 아무리 해도 늘지가 않는다. 팔 힘이 길러지지 않는다. 헬스클럽에 다닐때 아령을 그리 열심히 했건만 튀어나오지 않았던 알통. 내 생애 알통은 없는건가.

500m 달리기.

주말엔 너른 들판을 차지하는 운동팀들이 많다. 아침엔 야구팀이 들판을 차지 한다. 들판은 서너팀 이상의 축구팀이 뛸 수 있을만큼 넓다. 요사이 오리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다. 백로와 두루미는 여전하다. 아, 그리고 지난 가을 보았던 새를 다시 보았다. 머리가 희고 날갯 죽지는 짙은 회색을 띤 새. 새들이나 식물이나 명찰을 좀 달고 다녔음 싶다. 무지한 소시민의 말도 안되는 바람이지만. 노란나비, 호랑나비, 흰나비도 요새 철을 만났다. 어릴때 나비가 뿌리는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단 소리를 들었던 터라 아직까지도 난 나비가 두렵다. 나비를 눈 가까이 대고 가루를 뿌려대지 않는한 어려울 텐데도 어릴 때 기억은 엄중한 법전같아서 거스르기가 힘겹다. 

땀에 흠뻑 젖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after
중편 소설을 한 나절이나 걸려 읽은 어제의 경험을 되밟지 말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30분 정도 소설을 쓰고 쉰다고 하는데, 그 말을 또 엄중한 법전으로 밀어넣을 기세다. 
게으름의 핑계는 얼마나 다양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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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조 | 2008/05/04 15:00 | 공중산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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