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5월 09일
돌풍
얇은 블라우스에 샌들을 신고 도서관에 갔다. 바람이 몹시 불어 쉬폰 블라우스가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춥지는 않았다. 바람 속을 걷는 게 힘겨웠을 뿐. 책을 반납하고 책을 빌렸다. 정끝별의 산문집과 강준만의 책, 90년대 옴니버스 소설집. 얼마전 들어온 새 책들은 벌써 대여중이라 예약해 두었다.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다고 해서 도서관 홈페이지를 뒤적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늘 앉아 책을 읽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평소보단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요즘엔 내 집에서 독서하는 게 편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면 붙박이가 될 수는 있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지난 가을과 겨울만 해도 그랬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버스로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오늘은 장이 서는 날이라 장을 좀 보긴 했지만 유난히 긴 시간을 보내고 온 것 같다. 아파트 단지에서 부는 바람은 두 시간 전보다 더 거세졌다.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게 힘겨웠다. 장바구니가 없었어도 충분히 지치게 했다. 아파트 정문에서 후문 쪽에 있는 집까지 10분 이상 걸린다. 오백미터 달리기를 두번쯤 반복한 것처럼 엘리베이터 앞에 왔을 땐 힘이 쫙 빠져있었다.
지금도 바람이 불고 있다. 돌풍에 가까운 바람. 바닷가 호텔에서 듣던 그 바람소리같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으스스한 바람 소리. 환기를 시키려고 보조 주방 쪽에 창문을 여는 순간, 빛의 속도로 바람이 쳐들어왔다. 바닥에 있던 비닐 봉투가 공중을 휘휘 떠다녔다. 비닐 봉지 속으로 바람이 말려들어가자 동그랗게 부푼 검은 얼굴이 되어버렸다. 살살 약올리는 듯한 가벼운 얼굴.
민이 뉴질랜드에 가자고 문자를 보냈다. 거긴 겨울이잖아, 나의 대답에 민은 센스쟁이라며 웃었다. 민이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들은 휘슬러를 비롯해 눈 쌓인 풍경 일색이었다. 따뜻한 나라에 가서 쉬고 싶다는 민의 바람대로 우리는 움직일 수 있을까. 자유로운 것 같은데도 막상 어딘가로 떠나려고 하면 발목을 잡는 것들이 많아서 불행하다. 시어머니의 생신과 친정 아버지 생신이 하루 차이라 6월 초에는 어려울 것 같다. 남편은 요즘 미국 본사와 일을 하다보니 미국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아침엔 자고 밤새 일한다. 차라리 남편이 나보다 더 자유롭다. 여행을 갈 거라 하면 친정엄마의 걱정이 일박 이일 이상 이어질게 뻔하다. 이번에도 여행가기 전 날 말해야지 싶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말하는 거다. 부디 내 손이 약속을 지켜야할텐데. 여권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았다. 이름을 바꾸고 나서 바로 갱신한 여권. 여권 사진의 나는 매우 어려보일 뿐더러 수더분하다. 받아쓰기 한 개만 틀려도 엉엉 울 것 같은 얼굴, 등을 밀면 그대로 넘어져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 백야의 나라에서 일주일 이상은 머물고 온 것처럼 몽롱한 얼굴.
바람이 좀 숨이 죽었나. 건너 고등학교 교실은 일제히 불이 꺼졌다. 숙직실 텔레비전 불빛만 어룽거리고 있다.
# by | 2008/05/09 21:51 | A4 - A day | 트랙백 | 덧글(2)






